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단 편집) === 1940년대 === 1940년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정부 청사를 [[상하이시|상하이]]에서 난징, 광저우, 창사 등으로 옮기다 [[충칭시|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임시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도입하여 3월 13일 주석에 [[김구]]를 옹립했다. 5월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임정 내 [[한국국민당]], [[한독당|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은 합당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9월 17일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삼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여기에 소속된 장군에는 백파 [[김학규]] 등이 있었다. 1941년 11월 28일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보통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 등의 내용을 골자로하는 건국 강령을 발표했다. 10년 전인 1931년 발표된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 세 분야의 균등을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임정이 이를 채택해 건국강령을 새롭게 발표한 것은 사회주의 계열과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3일 뒤인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1942년 사회주의 계열인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총본부를 이끌고 충칭으로 와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사실 무장 독립투쟁의 규모나 교전경험만을 따진다면 광복군보다 조선의용군의 활약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용군 경우는 화북지대에서 중국팔로군, 신사군과 같이 활동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김무정]]이 이끌었던 태항산 전투 등이 있다. 하지만 조선의용군은 광복 이후 [[6.25 전쟁]]때 [[조선인민군]]으로 대거 편입해 한국군과 UN군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좋게 보기 힘든 상황. 그리고 [[장준하]]의 돌베개에 의하면 광복군에는 [[아편]] 장수나 [[일본군]] [[위안부]]의 [[조선인]] 포주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광복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모두 '독립운동 했던 것처럼' 위장하려고 했던 흔적이다.] 사실 김원봉의 라이벌 [[최창익]]이 김원봉과 싸우다가 3개 대대 중 2개 대대를 이끌고 화북([[중국 공산당]] 세력이 있었던 지역)으로 가서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군대 내 입지를 상실하여 임정으로 간 것이었다. 최창익은 언제까지 눌러앉아 있지 말고 중국 공산당의 협력을 받아서라도 서둘러서 항일투쟁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광복군]]은 이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어 비전투 공작 활동을 수행했으며, [[미국]] OSS(미군 전략 정보처)와 합동으로 [[국내진공작전]][* 일부에서는 이를 [[광복군]]이 내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으로 오해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의 핵심 내용은 광복군을 내지에 잠입시켜 주요 시설을 폭파하거나 일제 요인에 대한 암살, 내부 봉기 유도 등의 공작 활동이 주였다. 그 과정에서 미군이 인천 등지를 통해 상륙하면 광복군이 이를 지원하는 형태로 하는 것이 국내진공작전의 주 골자였다.]을 실행하려 했으나 일제의 조기 항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만약 [[일본 제국|일본]]이 조금만 더 늦게 항복을 해서 이 작전이 실제로 수행되어 성공했다면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 역시 엄연한 [[연합국]] 자격으로 스스로 독립을 성취해낸 것이므로 [[남북분단]]과 같은 상황이 오지 않을 수 있었더라며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견으로는 일본의 8월 항복 자체도 매우 늦은 거였고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해본 것에 대해 역사에 if를 가정하는 것도 의미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때는 소련군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해서 더 지체됐다가는 한반도 전체로 밀고 내려올 수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광복군]] 참조.[* 당시 한국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 중 일부로 [[미군]]이 [[제주도]]에서 일제로부터 자유를 되찾으면, 임시정부가 제주도로 상륙하여 청년들을 훈련시킨 후 본토로 올려 보낸다는 것이 있었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자 일제가 제주도에 대한 경비 태세를 강화한 사례도 존재한다. (출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같은 해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1944년 개헌을 통해 이들이 내각과 임시의정원에 진입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한다.[* 이때 당시의 좌우합작 경험은 훗날 해방정국에서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기도 했다. 다만 남북협상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 직전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식민지의 독립이 전후 [[인도 제국]]의 독립 의식 고취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미국]] [[FDR]]에게 특사를 보내어 전후 한반도를 신탁통치 구역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는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임정도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 [[파일:Korean_Commission.jpg|width=70%]] || [[파일:Korean_Delegation.jpg|width=100%]] || || 첫째줄 왼쪽부터 [[정기원]], [[김현철]], 배민수, 강택모, 한영교, 둘째줄 왼쪽부터 신상근, 제임스 신, 임창영, 뒷 줄 왼쪽부터 7번째부터 [[임병직]] , 김세선, [[프란체스카 도너 리]], [[최용진]], [[이승만]], 뒷 줄 오른쪽 맨 끝이 이원순, 한 명 넘어서 오른쪽 3번째 여인이 그의 부인 [[이매리]] || 앞줄 왼쪽부터 [[송헌주]], [[이승만]], 이살음. 뒷줄 왼쪽부터 [[윤병구]], 정한경, 유경상, [[임병직]]. || 이에 [[이승만]]은 1943년 「World Affairs」지(誌) 6월호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a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243] >국무성이 한국을 다른 망명 정부와 구별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우리는 묻고 싶다. 국무성의 완고한 둔감성이라든지 일본에 대한 애정 또는 한국에 대한 편견을 이유로 할 수는 없다. 국무성이 공식적으로 표명한 이유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하는 행동의 선례가 많은 까닭이다. 그럼 왜 한국만이 유독 포기되어 있는가? 공평한 심판관이 발견할 해답은 즉, [[소련]]이다.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서 한국의 독립을 결의해줄 것을 당부했고 장제스는 이를 약속하였다. 이후 카이로 회담서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kBb&articleno=2861&categoryId=58®dt=20141205165709|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40319/61823420/1|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결의’ 누가 이끌었나]]][* 그러나 이는 중국이 김구를 통해 한국을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려는 포석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1945년, [[이승만]]은 「The Case of Korea」라는 팜플렛을 발간하여 여기서 한국 임시정부가 승인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시아 전쟁에다 [[소련]]을 끌어넣으려고 갈망했던 일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에 이 승인이 보류되었던 것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요구가 명료해질 것을 기다렸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원인이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강대국]]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약소국의 독립을 희생시키려는 어리석은 정책 또는 강대국의 요구를 만족시킬 때까지 어떤 외교 정책도 취하려고 하지 않는 겁쟁이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어느 쪽이든 도저히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는 원인이다.[*a]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